영화 1987: 신발 한 짝에 떠오르는 이야기들

영화 1987: 신발 한 짝에 떠오르는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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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987: 신발 한 짝에 떠오르는 이야기들

 

어둠의 경로로 마침내 영화 1987을 보았다.

최근에는 미국에서도 한국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있는 곳이 많아졌지만 한인들이 많이 모여사는 대도시의 경우이고, 내가 사는 명왕성처럼 머나먼 시골에서는 아직도 한국 영화를 어둠의 경로를 통해서나 겨우 볼 수 있다 🙁

 

내가 고등학교 1학년이던 1987년에 내가 살던 부산에서는 서면과 남포동 광복동에서, 그리고 서울과 다른 모든 도시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했다는 것을 기억하지만, 이 영화를 보니 정확하게 어떤 계기와 어떤 사건으로 인해 그 시위가 시작되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영화의 시작은 박종철 열사의 죽음에서, 그리고 영화의 마무리는 이한열 열사의 죽음으로, 그렇게  잘생기고 미래가 촉망되던 두 대학생 오빠들의 이야기를 계기로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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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언어학과 학생이던 박종철, 연세대 경영학과 학생이던 이한열, 이 두 대학생은 아직도 살아있다면 내 남편 혹은 내 친구네 남편들과 비슷한 연배일 것이다.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학교 선생님들은 위험하니 시위 현장 근처에도 가지 말라고 당부를 하셨고, 신문이나 뉴스보다는 하이틴 로맨스와 쑈 프로그램을 더 즐겨보던 나와 친구들은 그저 잘생긴 대학생 오빠야들이 데모하다 죽었다는 것을 안타까워했을 뿐이었다.

포토샵 처리라고는 전혀 없는 낡은 흑백 사진에서도 저리 훤한 인물이니, 게다가 서울 명문대에 입학한 수재이니, 저런 아들을 두었던 어머니들은 그 얼마나 자랑스러웠고, 또 그 허망한 죽음에 얼마나 상심하셨을지, 엄마의 마음으로 짐작해본다.

 

영화의 극적 반전과 재미를 위해 강동원이 맡은 배역은 영화가 개봉하는 날까지 비밀로 하고 “잘생긴 대학생 역” 이라고만 소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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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원이 다니던 연세대 교정과 입었던 옷과 신발 등등 그 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낸 영화 세트장과 소품 등의 장치가 아주 훌륭했다.

 

연세대 정문에서 시위를 하다가 최루탄에 맞고 쓰러진 이한열 열사가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리는데, 극중에서 이 신발은 제법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민주화 운동이나 시위에 관심없던 여대생 연희를 시위현장으로 이끌어내고, 삼촌을 도와 민주화 운동을 하게 만드는 매개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한열 열사가 신었던 타이거 운동화는 시위 현장에서 밟히고 망가져버렸는데 그걸 복원해서 이한열 기념관에 전시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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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나도 동생도 신어봤던 그 타이거 운동화.

 

여기서부터 영화나 영화의 주제와는 상관없는 나만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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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고학년,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내가 신었던 신발은 월드컵, 타이거, 그런 상표가 대부분이었다.

내 부실한 기억으로, 월드컵 운동화는 대략 5천원 정도 하는 가격이었다.

“프로” 월드컵은 그보다 비싸서 7-8천원 혹은 만원 가까이 하는 가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같은 회사에서 만든 운동화이지만 “프로” 월드컵 운동화는 로고가 더 세련되었고, 발의 충격을 더 잘 흡수해서 발을 보호하는 재질로 만들어졌다며 더 비싼 값을 받고 팔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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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맥락으로 스펙스와 “프로” 스펙스 운동화도 있었다.

인터넷을 아무리 검색하봐도 “그냥” 스펙스 로고는 찾을 수가 없었는데, 아래의 “프로” 스펙스 로고 중에서 가운데 막대기 부분이 없는 옆으로 눕힌 하키 스틱 모양이 “그냥” 스펙스 운동화의 로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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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너무 촌스러워 보이지만, 그 때 그 시절에는 이렇게 머리에서 발끝까지 “프로” 스펙스나 “프로” 월드컵, 혹은 기타 유명 상표가 돋보이는 패션이 청소년들에게는 선망의 시선을 받았던 패션 트렌드가 있었다.

반 친구 중에서 약국을 하는 부모님을 둔 친구, 혹은 뭘 하시는지 몰라도 돈을 많이 버시는 부모님을 둔 친구들은 이런 “근사한” 차림새를 하고 등교했지만, 우리 부모님의 소득 수준은 내게 “그냥”
 월드컵 운동화나 타이거 운동화를 허락할 뿐이었다.

한 켤레에 만 원이 넘어가는 나이키 운동화는 그야말로 꿈의 운동화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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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십여 년이 지난 요즘의 나는, 운동화는 당연히 나이키 또는 아디다스를 신으며, 그 시절 선망했던 “유명” 상표의 옷이나 가방 쯤은 얼마든지 사서 입고 들고 다닐 수 있는 형편이 되었다.

(앗싸~ ㅎㅎㅎ)

 

최근에 친하게 지내게 된 송이씨가 내게 가끔 하는 말이 있는데, 나더러 아이들에게 참 너그럽고 허용적이라고 한다.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다 들어주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내가 그랬나?” 하고 돌아볼 정도로, 나는 일부러 그런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자연스럽게 늘 아이들의 주장을 따라가는 편이었던가보다.

신발 생각을 하며 회상해보니 내 그런 성향은 아무래도 내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 같다.

가진 것이 없어 못해줄 뿐, 형편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는 자식이 원하는 것을 다 해주고 싶어하셨던 부모님의 마음이 새삼 기억난다.

한 켤레에 만 원이 넘어가는 나이키 운동화는 사줄 수 없는 형편이니 오천 원짜리 타이거 운동화를 사주지만, (타이거나 월드컵 운동화도 나름대로 이름있는 회사에서 만든 좋은 제품이다) 생일이나 졸업 입학등의 특별한 날에는 나이키 로고가 박힌 양말을 사주셨다.

양말 역시 유명 상표 로고가 박힌 것은 보통 시장에서 살 수 있는 양말의 몇 배가 되는 가격이었지만, 그래도 운동화에 비하면 비교적 부담없이 구입할 수 있는 금액이니, 아이들이 그렇게나 좋아하는 나이키 상표를 몸에 한 번 붙여주려는 마음이셨던 거다.

어릴 때 우리집이 충분히 잘 살지 못해서 나이키 운동화 한 번 못신고 죠다쉬 청바지 한 벌 못입어봤어도, 우리 엄마 아빠의 마음만은 언제나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해주고 싶어 하신다는 것을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부모님을 원망하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우리 아이들은 각자 입맛과 취향이 많이 다르다.

따라서 도시락으로 무슨 음식을 싸주면 좋을지 원하는 바도 다르다.

둘리양은 맨밥에 조미김을 싸가는 것을 좋아하지만 코난군은 햄과 치즈를 넣은 샌드위치를 좋아한다.

어떤 날은 학교 급식으로 나오는 메뉴가 좋다며 도시락을 안가지고 가는 날도 있는데, 나머지 한 아이는 어김없이 그 메뉴가 먹고 싶지 않다며 내게 도시락을 싸달라고 한다.

두 녀석이 통일해서 급식을 먹거나 도시락을 먹어도 같은 메뉴로 먹으면 내 일이 수월해지겠지만, 각자 다른 아이들이 각자 다른 욕구가 있으니 그걸 존중해서 매일 아침 도시락을 준비해주고 있다.

김밥을 쌀 때에는 모든 재료가 들어간 코난군을 위한 김밥과, 햄과 게맛살만 들어간 둘리양의 김밥을 따로 준비해준다.

아이들과 함께 장을 보러 가면 각자 먹고 싶은 음식을 고르게 하고 사준다.

아침마다 학교에 입고 갈 옷도 아이들이 직접 고르게 하고, 그것이 너무 심하게 해롭지 않으면 아무런 반대를 하지 않는다.

즉, 영하의 기온에 민소매 옷을 입겠다고 하지 않는 이상은 아무리 우스꽝스런 조합이거나 다소 추워보이는 옷차림이라도 허용한다.

“추워도 니가 춥지 내가 춥냐?” 하는 생각도 있고 ㅋㅋㅋ 이 정도 날씨에 이 정도 옷을 입고 가니 춥더라 혹은 알맞더라 하는 것을 직접 체험해서 깨달으라는 목적도 있기 때문이다.

 

자신 혹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가 아니고서는 웬만한 일은 다 아이들이 원하는대로 따라가주니, 아이들은 나를 무척 좋아한다.

그리고 엄마가 안된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 위험하거나 절대 안되는 일이 분명하기 때문에 엄마의 말을 잘 듣고 따른다.

그러니, 사실상 아이들의 요구를 가능한 한 다 들어주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부모에게 편한 일이 된다.

아직 어리기 때문에 어차피 아이들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다.

그러니 나라도 보탬이 되어, 아이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하고, 스스로 세운 계획을 실행하게 해주고 싶다.

 

 

2018년 2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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