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완 선생을 가까이 보게 된 것은 87년 가을이었다. 6월 항쟁으로 직선제를 얻어냈지만, 양김의 분열로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어려워 보여서 다들 좌절하던 시기였다. 그 때 난 어쩌다 학년 과대표를 맡게 되었고, 그 당시 그 위치(?)에 오르면 고민하는 것들을 나도 고민하게 되었다. 학교는 너무도 조용했고, 이러면 필패하리라는 패배의식을 어떻게든 벗어나고자, 친구들과 술도 많이 마셨다. 결과는 뻔하겠지만, 그래도 서로 터놓고 이야기해보자는 생각으로 과회의를 소집하기로 했다. 이런 회의를 하자고 하면 대부분의 동기들은 사라지고 7-8명만 남는 분위기여서, 약 30여명의 학우(클래스메이트, 그땐 이렇게 불렀다)를 각각 따로 만나서 회의에 꼭 참석하라고 당부를 했다. 다행이 33명, 거의 다 모여서 이야기를 하던 도중에 어쩌다(?) 만장일치 (기권 1명)로 수업거부 및 시험연기를 결의하고 말았다. 학교내에서 처음으로. 그날 저녁에 집에 있던 비싼 XT 컴퓨터로 결의문을 쓰고, 학교 앞 복사집에서 몇 백부 복사해서 교문에서 나눠주었다.
또 다른 친구는 우리가 이렇게 결의하였다는 대자보를 써 붙이고, 우리들 중의 반 이상은 처음으로 메가폰을 들고 외치는 동기와 함께 ’00 이여 깨어 나라’ 며 학교 안을 돌았다.
아마도 많은 학교내의 수많은 학우들이 비슷하고 생각하면서도 고민만 하고 있는 상황에, 우리는 우연히 그 불쏘시게가 되었다. 그 후에 많은 다른 과에서도 동참하면서, 학교내의 분위기는 물어익었다. 민중 후보를 추대하는 쪽에 서 버린 우리는 백기완 민중후보 출정식을 포함해서 그분의 유세장에 항상 함께 했으며 그 추운 구로 공단에서 벽보를 붙이기도 하고 가가호호 방문하기도 했었다.
당시 민중후보를 미는 쪽의 입장은 백만표를 모아서 양김 단일화의 압박하는 것이 목표였다. 아래에 사진 속의 나도 앉아서 백기완을 연호했다.
내 기억으로 이 집회를 끝으로 양김을 설득하기를 실패한 백기완 후보는 처음 출마할 때 약속한 데로 후보를 사퇴했다. 그리고, 그 선거는 졌다. (졌다라고 보기 보다는 나는 이 선거가 조작 되었다고 아직도 믿고 있다.) 선거 후에는 구로 구청의 농성에 참가했었는데, 그곳에 투표함을 바꿔치기 한 증거를 지키기 위해서 농성 중이었다.
그해 필리핀의 아키노 대통령이 민선으로 당선된 것으로 기억하는 데 그때 전국민들이 개표소를 지키며 눈을 부릅뜨고 부정선거를 막은 것이 큰 힘이 되었다고 알려져서, 전국적으로 구청(개표함 보관소)에 모여들어서 개표를 감시하자는 운동이 있었다. 그때 많은 부정선거 의혹이 알려졌었는데, 그 중 가장 의심나는 것은 구로구청 건이다. 구로 구청에서 나가는 이상한 용달차 (픽업 트럭)를 시민들이 막은 것이다. 언뜻 보기엔 그 용달차의 짐칸에 수많은 낱개로 포장된 빵이 있었는데, 그 빵을 들쳐보니, 투표함이 막 봉인되어 ( 요즘 처럼 테이프로 붙인 것이 아니라 풀로 갓 바른, 젖은 흔적이 나타난 투표함) 있어서 시민들이 투표함을 빼았아서 증거로 보관하고 있었다. 이 농성장엔 문익환 목사 등등 수많은 사람들이 응원하고 갔다. 그곳에 많은 사람들이 왔다 가고 해도, 점심이나 저녁을 먹으러 중국집을 들러서 뉴스를 봤는데, 뉴스는 전국에 아무런 문제 없이 차분히 개표가 진행되고 있다는 말에 분개를 했던 기억도 있다. 그날 밤샘 농성을 할 수가 없어서 다른 친구들과 집으로 가게 되었는데 아마도 밤에 전경들이 진압을 할거라는 생각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새벽 6시에 진압을 했고, 진압과정에서 양 모씨는 떨어져서 불구가 되었다. 그 당시는 개표가 사흘 가량 지속 되었는데, 정의구현 사제단이 사흘 동안 개표방송 (티브이가 다른 방송을 중에 요즘 축구 중계처럼, 왼쪽 (혹은 오른쪽) 상단에 득표수를 사흘 동안 보냈던 것으로 기억된다.)을 녹화를 해서 분석했다. 정의구현 사제단에 의하면 시간이 지나면 득표수의 늘기 마련인데, 어느 후보의 득표수는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줄어들었다고 했다. 정의구현 사제단은 이것을 증거로 부w정 개표에 관한 소송을 했다. 이 소송건은 지지부진하게 거의 1년을 끌다가 그냥 끝난 것으로 안다. (88년 5월에 창간된 한겨레신문을 하루 종일 들고 다니면서 광고를 제외한 모든 면을 읽었기에 선명이 기억난다. 그 때의 한겨레신문은 현재와 한겨레와 달랐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눈을 정말 많이 띄게 되었다.
내가 오직 관심을 가졌던 이공계적 시각과 이분법적인 교육환경에서 나도 모르게 다른 한쪽을 배타적으로만 생각만 해왔던 나에게 세상은 모든 것들이 맞물려 돌아가고 있으며, 내가 관심을 꺼버리는 순간 다른 쪽에서는 너무도 쉽게 자기의 이익을 챙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백기완 선생께서 타계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의 눈을 뜨게했던 그 경험들 눈앞에 스쳐갔다. 87년 대선후보 출정식부터 대학로의 마지막 유세까지, 그의 사자후 연설은 나의 막였던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었다.
거의 모든 현안에 노동자, 농민, 민중을 위한 일이면 서슴지 않고 나셨던 선생이셨기에, 항상 가까이 계신다는 착각을 하기도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궤적을 달리하거나 아예 반대방향으로 전향 (아니 변절)을 하는 것이 보아왔기에, 그 흐트러지지 않았던 삶은 큰 귀감이 된다.
나도 저렇게 꼳꼳한 정신으로 남은 삶을 크게 흔들림이 없이 살 수 있을까?나이가 들면서 한 순간에 훅 가는 사람들을 너무도 많이 본다.
경험과 경륜만 믿고 잠시 방심하는 순간에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되고, 그 잘못된 판단을 바로 인정하면 될 것을 오히려 방어와 변명을 하면서 더욱 깊은 나래로 빠진 경우를 너무도 많이 보아왔다. 그들과 똑같은 오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는 끊임없이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한때는 젊었을 때의 올바른 판단과 생각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평생토록 깨어있는 생각과 올바른 판단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 같다. 그렇지 않았다가는 한순간에 훅가는 수가 있다.
그의 삶처럼 일관된 생을 살고자 노력하자.
사족 1: 나 나름 기억력이 좋은 편이라 자부했었는데, 기억은 조작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옛날 기억들을 좀 적어본다. 나중에 읽었을 때도 같은 내용일까?
사족 2: 한달 전에 끄적였던 글을 이제야 올린다. 그 사이에 미얀마에서는 80년 광주와 같은 상황이 벌써 3번째인가 4번째 반복되고 있다. 미얀마에 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리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미얀마 군부에 총에 목숨을 잃은 이들을 온 마음으로 추모하며, 국제사회에 미얀마의 군부를 압력할 수 있는 방법을 좀 강구했으면 좋겠다. 21세기하고도 20년이 지난 지금에 이런 쿠데타가 웬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