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20주년 기념일

해마다 12월 몇일이더라? 하고 헷갈리던, 그래서 자주 잊어버리고 넘어가던 결혼 기념일이 올해는 20주년으로 똑 떨어지는 제법 큰 숫자여서 기억할 수 있었다. 아이들에게 “이 날이 아빠 엄마 결혼 기념일이야, 이제 20주년이야” 하고 말해주었더니 둘리양은 12월 16일 아침에 나와 남편에게 이런 편지를 담은 봉투를 주었다.

코로나19 상황이 아니었다면 뭔가 거창하게 기념일을 빙자해서 이벤트를 했을텐데 – 예를 들면 유럽으로 크루즈 여행을 간다든지 ㅎㅎㅎ – 요즘 세상은 레스토랑에 가서 밥 사먹는 것 조차 조심스럽게 해야하니… 게다가 기념일 당일 저녁에는 내가 봉사하는 보드 월례 미팅이 있어서 외식을 할 수가 없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면서 개최하는 미팅이라서 드넓은 방에서 뚝뚝 떨어져 앉는다

그래서 다음날인 금요일 저녁에 아이들 아트 레슨을 마치자마자 바로 레스토랑에 가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무척 오랜만에 가보는 일본식 철판구이 레스토랑이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아마도 마지막으로 갔던 것이 3년 전쯤인 것 같다.

10명이 합석을 하고 셰프가 철판위에서 요리를 하면서 쇼도 보여주는 테이블이 이십여개쯤 되는 큰 레스토랑은 코로나19가 무색하게 사람들로 붐볐다. 음식을 먹어야 하니 어쩔 수 없이 마스크를 벗어야 하지만, 아직 테이블에 앉기 전에 로비에서 기다릴 때부터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이 마스크를 쓴 사람보다 훨씬 더 많았다. 요리를 하는 셰프나 서빙을 하는 직원들도 대부분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모든 사람들이 다 예방접종을 잘 받았기를 바랄 뿐이었다.

남편과 나는 둘이 나눠 먹는 셋트 메뉴를 주문하고 둘리양과 코난군은 각기 먹고 싶은 요리를 골랐다. 셋트 메뉴에는 전채요리와 후식이 같이 나오기 때문에 아이들과 나누어 먹을 수 있어서 좋다.

전채요리와 샐러드를 먼저 먹고 있는데 다른 테이블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났다. 그러고보니 우리 가족이 이 레스토랑에 처음 가기 시작했을 때는 우리 아이들이 어려서 하이체어에 아이를 앉히거나, 잠투정을 하는 아이를 한 팔에 안고 식사를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제는 아이들이 자기가 먹고 싶은 음식을 직접 고르고, 자기 손으로 음식을 먹고, 다음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대화도 할 수 있는 그런 날이 왔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가족과 함께 하는 외식에서 다른 일에 신경쓰지 않고 느긋하게 식사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결혼 20주년 기념 선물로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

전채요리를 다 먹고 기다리니 셰프가 손수레를 밀고 와서 요리를 시작할 준비를 했다. 한 테이블에 우리 가족을 포함에서 세 그룹, 아홉 명이 앉았는데 그들이 각기 주문한 음식이 다르니, 그걸 확인하고, 스테이크는 어느 정도 익힌 것을 원하는지도 물어보았다. 철판 하나에 아홉명분 음식을 요리해서 다시 주문한 사람에 맞게 나누어 주는 일은 상당히 복잡할 것 같다.

철판 위에 채소와 밥을 볶고, 고기나 해산물을 굽느라 바쁜 와중에도 양파로 화산을 만들어 보여주거나 계란을 볶음 주걱으로 던지고 받다가 요리사 모자위로 떨어지게 하는 묘기를 보여주고, 알콜에 불을 붙여서 화악~ 하고 불을 일으키는 등의 구경거리를 선사해주었다. 구운 새우 조각을 던져서 손님이 받아 먹는 놀이도 했는데 코난군과 남편은 잘 받아 먹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