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천구백칠십 혹은 팔십년대
"국민"학교 교실에서 주말마다 열렸던 "학급회의"
다음 주 우리반 목표를 "깨끗한 교실을 만들자"로 정하는데 동의하십니까?
하고 반장이 물으면 누군가가 "찬성이요" 하고 또다른 누군가가 "재청이요" 하고 말한 다음, 반장은 학급일지에 다음 주 목표를 그렇게 적었던 기억이 난다.
켸켸묵은 이 회의의 절차는 "국민" 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기억 저편 너머로 사라졌다고 생각했으나, 미국 유학와서 대학원을 졸업하고 교수가 된 후에 생생히 다시 떠올랐다.
학과 회의에서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때, 똑같은 절차를 거치는 것을 본 것이다.
"이러쿵 저러쿵 하여, 새 학과장을 선출하는 방법을 무기명 투표로 한다는 것을 무브(move) 합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면 또다른 누군가가 "I second the motion, 재청입니다" 라고 말한다.
그러면 회의를 주관하는 의장이 "이 모션(motion)에 찬성하면 아이(aye) 라고 말하세요" 라고 한다.
반대하는 사람은 아이(aye) 대신에 노 라고 말하거나 아이 의 반대말 격인 네이(nay) 라고 말하게 된다.
맨 처음 학과 회의에 참석했을 때 이 생소한 용어와 절차 – 비록 국민학교 학급회의에서 경험하긴 했지만 – 가 무척 낯설었다.
예스/노 대신에 아이/네이 라니?
모션 모션 하는데 그건 동작, 움직임 이라는 뜻 아닌가?
유명한 티비 만화 스폰지밥의 주제가에서 "아이 아이 캡틴" 이라는 가사가 나오는데, 다른 티비 프로그램이나 책에서도 아이 아이 캡틴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했다.
짐작컨대 옛날 선원들이나 군인들이 사용하던 단어인 것 같았다.
그렇게 어림짐작으로 회의를 진행하는 절차에 익숙해지기는 했지만, 중요한 의사표결을 하는 회의의 의장을 맡은 적이 없어서, 나는 주로 그런 회의에 참석해서 "아이" 라고만 말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이번 학기부터는 지역사회의 한 비영리단체 이사회의 상임위원회 의장을 맡게 되어서, 한 달에 한 번씩 내가 회의를 주관해야 하고, 따라서 위에 나오는 것같은, "이 모션을 무브하겠습니까?" 어쩌구 하는 대사를 읊어야 하게 생겼다.
이번 수요일이 의장으로서 처음 하는 회의라서 안건과 자료를 읽으며 열심히 예습을 하고 있으며, 의결 과정의 대사도 연습하고 있다 🙂
알고보니, 이런 절차는 미국 육군 준장 헨리 마틴 로버트가 처음으로 정리하여 제정한 것이고, 그래서 로버트 토의절차 규칙 (Robert's Rules of Order) 라고 부른다고 한다.
동료교수 가스통과 함께 지도하는 학생조직에서 학생들에게 참고하라고 나눠준 유인물 중에 하나가 이 로버트 규칙 요약본이었다.
학생 자치조직이니 지도 교수없이 자기들끼리 회의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 민주적인 절차를 밟으며 원활하게 회의를 진행하도록 돕기 위해서 가스통이 유인물로 정리해서 나눠준 것이다.
덕분에 내 의장활동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로버트 규칙 중에서 자주 쓰이는 용어 몇 가지를 기록해둔다.
모션 motion: 새로운 결정 사항을 말한다. 회의 참석자 중에 한 명이 "I move that…" 하고 말해서결정을 할 것을 요청한다.
재청 second: 모션을 무브하자는 의견이 나왔을 때, 그 모션이 최소한 두 명 이상의 사람으로부터지지를 받는다는 것 – 그래서 중요한 안건이라는 것 – 을 확인하기 위해서 다른 참석자가 "I second the motion" 이라고 말해야 한다. 당연하게도, 처음 모션을 무브한 사람은 재청을 하면 안된다.
일시연기 table: 한 가지 의결 사항을 놓고 토론하던 와중에 부차적인 문제를 더 의논하고 결정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그 문제는 일시적으로 미루어놓고 우선 먼저 의논하던 것부터 마치자, 할 때는 "we table…" 이라고 한다.
의결 처리 과정:
어떤 안건에 대해서 한 사람이 무브, 또다른 사람이 세컨드 한 다음에는 "It has been moved and socended that…(state the motion)…. Is there any discussion?" 하고 의장이 토론을 진행한다.
토론이 마무리되면 표결을 시작한다.
선거가 아닌 경우 대부분 무기명이 아닌, 구두로 의사표시를 하는 방식으로 한다.
"Those in favor of the motion that… (repeat the motion)… say Aye."
안건에 찬성하는 분은 아이 라고 말하세요.
"Those opposed say No"
반대하는 분은 노 라고 말하세요.
이제껏 내가 참석한 수많은 회의 중에서 "노" 혹은 "네이" 라고 말하는 사람은 한 번도 못봤다 🙂
대신에 기권 abstention 이라고 말하는 경우는 간혹 있었고, 어떤 첨예한 대립이 있었던 회의에서는 더 심도깊은 토론을 한 다음에 결정을 하자고 의견을 내는 경우가 있기도 했다.
내가 진행하는 상임위원회의는 대부분 헤드스타트 (저소득층 지원 무상 유아교육) 프로그램의 연간 평가나 규정을 리뷰하는 안건이 대부분이므로, 날카롭게 대립하여 의결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서 다행이다.
암튼, 그렇게 안건이 모두의 동의를 받으면 의장이 "The motion is carried." 라고 말한다.
이 때 의사봉이 있다면 멋있게 땅! 하고 쳐주기도 한다 🙂
이 글을 쓰기 위해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영어로 회의 용어및 의사발언을 잘 정리해둔 곳이 있었다.
http://contents.kocw.net/KOCW/document/2014/BUFS/kimdohun/10.pdf
완전 무보수로 지역사회 봉사 차원에서 하고 있는 이 일은, 유아교육 전문가만 맡을 수 있는 직책이라서 다른 사람에게 미룰 수도 없다.
매월 세번째 목요일 늦은 저녁에 이사회가 있는데 이번 학기에는 목요일 저녁 수업이 있어서 회의를 못가게 되어 잘되었다 싶었는데, 이제 이사회에 들어온지 3년째이니 조금 더 심도깊게 상임위원장을 맡아달라는 부탁이 돌아왔다 ㅠ.ㅠ
보통은 상임위원회의는 이사회가 열리는 날 조금 더 이른 시각에 하게 되는데, 나는 목요일 저녁 수업 때문에 시간을 낼 수 없으니, 나 때문에 다른 상임위원들까지 다른 날로 회의 일정을 잡아야 하게 되어서 미안한 마음이다.
2019년 9월 17일